매년 가는 페어 중 하나가 바로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다. 디자인 잘 모르는 ‘디알못(디자인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감각적인 새로운 브랜드와 제품을 알기에는 이만한 페스티벌이 없다. 그나마 없는 디자인 감각을 이 페어를 통해 조금이나마 배우고 싶은 의지가 크기도 하다.
사실 작년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때는 살짝 실망을 했다. 재작년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새로운 브랜드와 상품의 발견성도 적었다. 게다가 ‘판매’에 많이 치우쳐있다보니 디자인 페어보다는 플리마켓 같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래서 올해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은 갈지 말지 고민이 많았다. 그런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입장료가 아깝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2019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을 둘러보면서 이 생각은 확실히 바뀌었다. 작년과 다르게 볼만한 것들이 늘었고 ‘새로움’이 ‘익숙함’보다 훨씬 많았던 페스티벌이었다. 모르던 브랜드, 기발한 아이디어 제품도 많아서 새롭게 얻어 가는 것이 많았다. 다시 ‘배우는’ 디자인 페어로 바뀐 것이다.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을 둘러보면서 메모하고 사진 찍었던 것들을 두 차례에 나눠 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오전 10시 30분, 오픈할 때 들어가 오후 1시, 점심 즈음에 나왔으니 무려 2시간 30분 가까이 둘러봤다. 그만큼 볼거리, 즐길거리, 생각거리가 많았다. 이를 하나씩 잘 기록해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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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을 한 바퀴 둘러보고 든 생각은 ‘업사이클링’의 대세였다. 많은 디자인 브랜드 및 스튜디오가 ‘업사이클링’에 집중하고 있었다. 버려지는 자원에 ‘디자인’을 입혀 새로운 상품 가치를 부여하는 일에 앞장서는 곳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브랜드가 전시장에 입장해 곧게 걷다 보면 눈에 걸리는 ‘RE;CORD(이하 래;코드)’다. 포장 마차 컨셉으로 만들어진 부스는 멀리서봐도 눈에 확 띄었다. 게다가 재활용의 대명사인 ‘방수포’로 부스를 디자인하여 업사이클링 브랜드라는 컨셉에 충실했다.
방수포로 디자인되어 있어 밖에서도 눈에 띄었던 래;코드 부스
포장마차를 들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입장하면 여러 테이블을 만날 수 있다. 그 위에는 가위, 네임펜, 다리미 등이 놓여져 있는데 알고보니 이 곳에서는 ‘옛 에코백’을 만드는 체험활동이 특정 시간에 진행되고 있었다. 입장할 때 마주치는 아이스크림 냉장고 안에서 맘에 드는 천을 골라 자리에서 자신만의 에코백을 디자인 하는 것. 선착순 20명으로 진행한 이 체험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긴 줄이 부스 앞에 늘어지기도 했다.
체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테이블과 제작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이 브랜드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코오롱 인더스트리 FnC가 2012년에 런칭한 브랜드였다. 부스 느낌으로는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 또는 스타트업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대반전으로 ‘패션 대기업’이 운영하고 있던 브랜드였던 것.
개인적으로는 부스에 적혀 있던 다양한 사명 중 이 곳의 사명이 제일 좋았는데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RE; 생각의 전환을 기반으로 재해석된 디자인.
CODE 환경과 나눔의 가치를 공유하는 패션을 넘어선 문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소비 그 이상의 가치를 래;코드 합니다.”
래;코드는 사용 기간이 지난 군용품, 불량으로 폐기되는 산업 소재들, 코오롱 인더스트리 패션 브랜드에서 생산되는 많은 제품들 중 생산 후 3년이 지나지 않아 소각되는 것들을 의류, 가방, 신발, 텐트 등으로 업사이클링 하고 있었다.
래;코드의 활동을 보며, 패션 브랜드가 자신만의 자산과 노하우로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사회 공헌이 아닐까 싶었다. 가장 많은 의류 소재를 버리는 환경 오염의 주범이기도 하지만 가장 잘 ‘팔리는 패션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곳도 패션 브랜드다. 즉, 버려지는 의류 자원에 가장 높은 상품 가치를 매겨줄 수 있는 곳이 바로 패션 브랜드인 것이다. 코오롱 인더스트리도 자신들의 ‘역할’을 깨닫고 래코드라는 업싸이클링 브랜드를 만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역량으로 풀려는 모습.
이처럼 업이 만들어내는 불가피한 사회적 문제를 업의 노하우로 풀어내는 실험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속해 있는 업은 어떤 문제를 만들고 있으며, 이를 업의 노하우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업사이클링에 집중하고 있는 또 다른 브랜드로는 바로 ‘밀키 프로젝트’가 있었다. 마시고 버리는 우유팩을 재활용해서 지갑, 파우치 등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다. 부스 벽에 걸려 있는 다양한 우유팩 지갑을 보고 단숨에 이 브랜드에 빠져들었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우유팩으로 만든 지갑
‘밀키 프로젝트’는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김수민씨가 만든 2016년 3월 후쿠오카에서 시작한 업사이클링 브랜드로 국내에는 2016년 9월 서울 디자인 마켓을 통해 첫 선을 보였다. 김수민씨는 우유팩에 그 나라의 문화가 담겨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유팩에는 그 나라의 고유한 문자나 일러스트 디자인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 그래서 ‘우유팩을 재활용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 ‘우유팩 디자인을 활용한 새로운 상품’을 만든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기도 했다고.
이는 업사이클링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꾸는 발상이 아닐까 싶다. 보통은 업사이클링을 ‘재활용’ 관점으로 접근하지만, 밀키 프로젝트는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데 그 재료로 우유팩 디자인을 사용한다는 관점으로 전환했다. 그렇다보니 아무 우유팩을 쓰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적으로 우수한 우유팩 디자인을 제품의 재료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팔리는 제품’을 만들게 된 것. 관점의 전환은 큰 차이를 만들어내곤 한다.
또 한가지 밀키 프로젝트가 좋았던 점은 DIY 체험 키트를 판매하고 있다는 점. 이 덕분에 아이들도 직접 제품을 만들어볼 수 있었는데, 직접 자신만의 우유팩 지갑을 만들어보면서 환경 보호와 재활용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학습 도구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앞으로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고 싶은 브랜드.
제작 키트도 별도로 판매하고 있어서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었다.
아이들이 제작 키트를 활용해 직접 우유팩 제품을 만드는 모습을 담은 스케치 영상.
세번째 업사이클링 브랜드는 ‘Nukak’. 처음 살펴봤을 때는 ‘프라이탁’ 브랜드 느낌이 강해서 잠시 프라이탁이 아닌지 착각하기도 했다. 이 브랜드는 스페인에서 탄생한 브랜드로 바르셀로나 거리에서 버려지는 아름다운 배너, 카이트서핑 돛 그리고 타이어 튜브를 업사이클링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디자인 프로젝트라고 한다. ‘트럭 방수포’를 활용해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들고 있는 프라이탁과 비슷한 컨셉.
거리의 PVC 광고 현수막을 재활용해 만든 누깍 지갑 모습.
Nukak은 2001년에 시작해 벌써 20년 가까이 된 브랜드로 한국에는 2016년 3월 건대 커먼그라운드를 시작으로 브랜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관람을 끝낸 뒤 홈페이지를 통해 더 자세히 이 브랜드에 대해 살펴보니 프라이탁보다 훨씬 더 다양한 제품군의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들고 있는 듯 했다. 프라이탁과 더불어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 같은 글로벌 업사이클링 브랜드.
누깍 제품 공장 모습
마지막으로 발견한 업사이클링 브랜드는 ‘MailPack’이다. 종이로 만든 에코백을 선보이며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패션을 선보이는 브랜드. 우리가 들고 다니는 면 에코백은 ‘에코’하지 않다는 당돌함과 함께 ‘새로운 것’이 전혀 없는 ‘100% 업사이클링’ 제품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참신한 업사이클링 제품에 사진을 찍었고 인스타그램까지 팔로잉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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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업사이클링’만큼 돋보였던 흐름은 바로 ‘전통 식품을 재해석’한 것. 김을 새롭게 브랜딩한 ‘김씨김’, 쌀을 새롭게 브랜딩한 ‘핍밥’, 막걸리를 새롭게 브랜딩한 ‘호랑이 배꼽’과 같은 브랜드가 대표적으로 전통 식품을 잘 브랜딩한 브랜드였다.
가장 먼저 발견했던 브랜드는 ‘김씨김’. 김을 다루고 있는 브랜드였는데 깔끔한 패키지 디자인에 재치있는 카피가 제품을 둘러보는 재미를 더했다. ‘김’ 제품 답게 모든 제품명이 ‘-김’으로 끝나는 식이었는데 여친생김, 남친생김, 와이프섬김, 맥주 땡김 등과 같이 상황과 ‘김’을 잘 매칭 시켰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전통 식품을 캐주얼하게 풀어낸 것. 이런 제품이라면 지인 선물용으로 ‘김’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더 자세히 알고보니 공장이 아닌 ‘공방’에서 김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도 독특했던 브랜드.
김 포장을 심플한 디자인으로 만들어 선물용으로도 적합하게 만든 김씨김.
‘김’이라는 카피를 활용해 재미있는 카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발견한 ‘핍밥’은 쌀 브랜드. 깜찍한 쌀 캐릭터를 활용해 쌀 선물 패키지를 선보였다. 이 브랜드를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 쌀 브랜드 ‘아코메야’가 생각났다. 도쿄 여행을 갔을 때 이 브랜드를 보고, 우리나라의 쌀로도 멋지게 브랜딩 하는 곳이 있다면 참 좋겠다 싶었는데 ‘핍밥’이 그런 브랜딩을 만들어나가는 듯 싶어 반가웠다.
드디어 ‘쌀’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브랜드가 좋았던 점은 ‘캐릭터 굿즈’ 사업도 함께 하는 것. 요즘은 그야말로 ‘캐릭터’와 ‘굿즈’의 전성시대. 이 두개가 함께 만났을 때의 시너지는 더 대단. 대표적인 예가 바로 ‘펭수 다이어리’. 인기 절정 캐릭터 ‘펭수’와 대표적 굿즈 아이템 ‘다이어리’가 만난 결과,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1위에 하루종일 랭크된 것과 더불어 다이어리 예약 판매는 하루만에 1만 6000부를 넘겼다. 이와 같은 ‘굿즈의 전성 시대’에 발맞춰 쌀을 귀엽게 캐릭터화한 굿즈를 판매하며 브랜드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었다. 쌀과는 멀리하고 있지만 캐릭터와 굿즈와는 가까워지고 있는 1020에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
귀여운 핍밥의 캐릭터와 이를 활용한 굿즈
마지막은 막걸리 브랜드 ‘호랑이 배꼽’. 개인적으로는 술을 못마셔서 술 브랜드에는 관심이 없는 편인데 이 브랜드 역시 ‘캐릭터’ 때문에 눈길이 가게 됐다. 호랑이를 귀엽게 표현해 제품 곳곳에 심어둔 것. ‘어르신의 핫템’으로만 여겨졌던 막걸리를 젊은 세대에 맞게 재해석한 모습이 인상적.
업사이클링 브랜드와 전통 식품을 재해석한 브랜드를 하나씩 알게 되면서 ‘디자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버려지는 자원에 ‘디자인’이 입혀지니 새로운 가치를 지닌 제품이 되었고, 잊혀지는 전통 식품에 ‘디자인’이 입혀지니 젊은 세대가 스스로 찾는 먹거리가 되었다. 디자인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희미해지는 상품 가치에 활력을 불어 넣어 소비자가 다시 찾게 하는 힘. 그럼 힘을 만들어내고 있는 디자이너분들이 참 존경스럽고 부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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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디자인 페스티벌 전시장 안 푸드 코너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브랜드를 만났다. 바로 식품 브랜드 ‘오뚜기’를 만나게 된 것. 오뚜기가 레스토랑 브랜드를 가지고 있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들이 판매하고 있는 먹거리는 즉석에서 만든 요리가 아닌 전자레인지와 오븐으로 간편하게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가정 간편식’을 판매하고 있던 것.
점차 높아지고 있는 ‘가정 간편식’ 트렌드를 잘 겨냥했다는 생각과 재미있고 신선한 제품이라면 무조건 반사처럼 반응하는 1020세대를 잘 타깃한 마케팅이 아닐까 싶었다. 즉석에서 만든 요리가 아니라 ‘가정 간편식’으로 식당을 차려 운영할 생각을 하다니, 참 기발한 마케팅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매장 디자인도 레트로 감성을 듬뿍 담아 1980년대 미국 프랜차이즈를 이용하는 듯한 느낌이었고, 가정 간편식인 덕분에 조리 시간도 대폭 단축되어 수 많은 주문을 빠르게 처리할 수도 있었다. 또한 맛도 나쁘지 않은 듯 한번 먹고 난 뒤 또 주문해서 먹는 관람객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다양한 ‘미담’으로 많은 소비자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오뚜기’ 브랜드가 더 젊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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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맘에 드는 문구 브랜드를 발견하기도 했다. 바로 ‘엘피스튜디오’ 라는 곳이었는데, 멀리서부터 부스 벽에 걸려 있던 달력을 보고 발걸음 하게 되었다. 심플한 디자인의 문구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곳의 많은 문구 제품들이 심플 그 자체. 어떻게 다 사가나 싶을 정도로 모든 제품이 맘에 들어 구매하려 했었는데 다행히도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를 통해서도 구입이 가능하다고 안내되어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심플한 문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아래 링크로 들어가보시길. 분명 맘에 드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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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달아 맘에 드는 일러스트레이션도 발견했다. ‘미스터 두 낫띵’이라는 브랜드였는데 이곳 역시 부스 벽에 부착되어 있던 포스터를 멀리서 보고 찾아와 입덕하게 됐다. 가장 맘에 들었던 포스트는 아래 두번째 사진.
알고보니 이 브랜드는 이미 SNS를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글로벌 일러스트 브랜드. 특히 대만, 홍콩 등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브랜드라고 한다. 이곳 역시 다행히 온라인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었고, 제품 하나씩 모아보는 재미를 가져보고자 한다.
다음편에 이어질 Part.2에서는
– 제지업체 브랜딩
– 개인 맞춤형 제품 (안경, 샴푸 등)
– 재미있었던 디자인 상품
– 가위 하나에서 발견한 10가지 문제
에 대해 살펴볼 예정입니다.